종말의 근원

안녕하세요, 앤입니다. 오밤중에 5주차 원고가 와르르 올라와서 놀라셨죠....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그동안 쌓아놨던 세이브 원고를 한번에 푼 겁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잠시 연재를 쉬어갈까 해서요. 연재 시작한 지 고작 한달 정도 됐고 올라온 회차도 5개 밖에 안 되는데 갑자기 쉰다 하면 너무 실례일 것 같아 세이브원고라도 풀어봤습니다. 마침 ...

날카롭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처음으로 들이마신 숨이었다. 들어올 땐 차가웠던 것들이, 나갈 땐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뜨겁다. 그 느낌이 좋아서 그는 계속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의 호흡을 따라 근처에 식물이 피어났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그가 갑자기 숨을 멈췄다.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방독면을 쓴 중년의 여성이 그에게 다가와...

넌 내가 감염되면 어떻게 할 거야? 경은은 유독 주변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자주 했다. 그는 6년 전쯤, 바이러스에 감염된 가족들을 직접 총으로 쏴 죽였다. 그것도 감염 초기에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경은은 혹시 모르니 일단 치료해 보자 설득했지만 가족들은 제발 지금 죽여달라 했다. 그래서 죽였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의...

가리. 네 이름이 가리였구나. 혼자서 많이 힘들었지. 나도 견디기 힘든데 넌 오죽했을까. 말라붙은 털을 어루만졌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불어넣으며 가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것이니 이곳에 뿌리내리고 평생을 함께하자. 그는 가리의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건조하고 앙상한 코가 입술에 닿음과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겨울은 꿈을 꾸지 않았다...

온실에서의 하루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밥을 먹으면 겨울이 태서의 방으로 와 상처를 살펴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겨울은 서툴긴 해도 그럭저럭 치료 실력이 좋았다. 붕대와 거즈, 소독약, 연고, 항생제 등, 치료에 필요한 물자는 차고 넘쳤기에 태서는 아무 걱정 없이 겨울이 건네는 것들을 몸에 두르고 받아먹기만 하면 됐다. 확실히 ...

원래는 봄에 태어났어야 했어요. 하지만 거대한 나무 한가운데 종양처럼 자리 잡은 열매는 생각보다 크고 조급해서, 한겨울 눈이 날릴 때 나무에서 떨어져 부서졌죠. 온실 유리 위로 쏟아지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진득한 과육과 질긴 껍질을 찢고 나온 것이 바로 나였어요. 나는 과거 연구소였던 이 온실 안에서 태어났어요. 이곳은 식물을 바탕으로 온갖 연구를 진행하는 ...

혈흔이 끊겼다. 혜진은 숲 한가운데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밤까지 수색을 진행한 탓에 괴물을 마주쳐 등에 부상을 입었지만 고통 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옷 한 조각. 날붙이 하나. 하다못해 신체 부위 하나라도 발견하길 바랐는데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는 지킬게. 잠든 태서와 태라에게 해 주던 말이 떠올라 혜진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장벽 남쪽 3번 게이트 옆은 태라의 전용 스케치북이었다. 그는 시간이 났다 하면 장벽으로 향했다. 오래된 스프레이를 흔들며 벽을 그림으로 채워 넣는 게 태라의 유일한 낙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바빠서 평소에는 혼자 오곤 했는데 오늘은 일행이 많다. 팔과 다리를 다친 태서와 혁진은 밖에 나가는 건 물론이고 훈련도 못 하는 김에 태라와 함께 장벽으로 왔다. ...

“정신 좀 차려보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눈이 제대로 떠 졌다. 하긴. 그깟 옛날 일 하나 때문에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지. 태서는 급한 마음에 멋대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약 기운 때문인지 머리가 어지러워 연신 휘청거렸다. 혜진은 그런 태서를 부축해 침대에 똑바로 눕혀 주었다. “갑자기 일어나지 마.” “내가 여기 왜 있어요? 다른 ...

+등장인물 프로필

안녕하세요, 앤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생각보다 빨리 새로운 작품으로 만나뵙게 됐네요! 이번 작품은 보시다시피 GL이 아니라 여성서사 소설입니다. 사랑의 요소가 있더라도 단순히 연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조금 더 범위가 넓고 다양한, 그런 사랑일 테니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자들만 나오는 아포칼립스물을 써 보고 싶다는 각오 하나로 시작한 작품인데......

“마스크 똑바로 써요.” 코와 입을 가렸던 손수건을 내린 채 담배를 태우는 재연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 소리였다. 폐암에 걸려 금방 죽고 싶기라도 한 건지, 재연은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웠다. “왜, 너도 하나 주랴?” “됐어요.” “26이나 된 놈이 담배 하나 못하고.” 태서는 대답 없이 재연을 노려봤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재연은 결국 담배를 ...

무너진 건물 시멘트벽에 조잡하게나마 그려 넣은 과녁에 총구를 겨눴다. 차디찬 새벽공기를 들이마시고 방아쇠를 당기니 과녁에 맞기는커녕 제대로 빗나가 애꿎은 나무 몸뚱이에 총알이 박혔다. 태라가 이제 어떡하냐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자 태서는 고개를 저을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난 쏜다고 쐈는데...” 태라가 우물쭈물하며 제 언니에게 둘러댔다.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