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애

마지막화

3년 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오늘도 어김없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지아는 한숨과 함께 갑판으로 나왔다. 갑판은 늘 그렇듯 관광객들이 건넨 새우 과자를 받아먹으려는 갈매기들로 가득했다. 시끄러운 갈매기 울음소리와 웃음소리 너머로 삐 소리가 들렸고 지아는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겼다. “나예요, 승완언니. 이번에도...

도애는 마취에서 깨어나 케이지 안에 갇힌 자신을 보자마자 모든 걸 포기해 버렸다. 마음만 먹으면 휠 수 있는 창살이었고 힘만 주면 부술 수 있는 벽이었는데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기를 써서 탈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승완이 그를 죽일 거라는 이야기를 엿들었을 때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어...

여기 한 자매가 있다. 아버지는 주정뱅이에 가정폭력범이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질려 진작 떠나버렸다. 자매 중 언니는 원래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저보다 7살이나 어린 동생이 발목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동생을 지키고 싶은데 아비라는 인간은 노망이라도 난건지 동생을 놓아주지 않았다. 제게 남은 건 이 아이밖에 없다고 버티는 모습에 순간...

중년에 접어들 무렵, 유림은 자신이 죽는 순간을 자주 상상했다. 나이는 둘째치고 평소 잔병치레가 많았기에 이러다 정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몰라도 그 상상 속에는 항상 도애가 있었다. 유일하게 곁에 남아 임종을 지키는 도애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유림의 손을 부여잡기만 했다. 그러면 유림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도애에게 ...

“기다려.” 승완이 친부모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은 부탁이었다.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에 가까웠지만 승완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부탁이라 믿고 싶었다. 그의 부모는 한겨울 눈이 몰아치던 버스 정류장에서 한 그 부탁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승완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날 때부터 혼자. 정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못하는 존재. 그게 승완이었다. 하필 타고난 심성도 ...

다락방에서 뛰어내리느라 팔과 다리 곳곳이 찢어지고 긁혔다. 하지만 도애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괴로웠다. 머릿속이 온통 아까 들은 말로 가득해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어려웠다. 그는 결국 어제 종아리에 감아뒀던 붕대가 풀려 발에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달리기를 멈췄다. 그가 도달한 곳은 파도가 거세게 몰...

어제 그 난리가 났었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날씨가 맑다. 유림은 논문을 읽다 말고 방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빛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안경을 벗고 피곤에 찌든 눈가를 문지르다가 잠시 쉴 겸 거실로 나갔다. 도애는 이미 새벽에 밖에 나가고 없는지 하루종일 집이 조용하다. 그가 일어났을 때도 다락방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아마 해가 ...

하늘이 요동쳤다. 천둥에, 먹구름마저 제대로 뿌리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었다. 도애는 집에서 나오자마자 숲으로 달려갔다. 날카로운 돌을 밟아 발바닥이 찢어져 피가 났지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온몸이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집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오솔길조차 나지 않은 숲을 달리면서 두 볼을 스치는 게 빗물이 아니라 눈물이었으면 좋...

유림은 원래 밖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공부할 것이 산더미라 도애를 챙길 시간이 도무지 나질 않았다. 하지만 소나기치고는 빗줄기가 거세서 혹시 몰라 바닷가로 나가봤다. 그러다 우연히 도애와 함께 있는 지아를 만났다. 별로 얽히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유림은 지아를 집까지 데리고 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아라고 했지...

“어딜 갔었니?” 지아를 만나고 홀로 숲 산책을 하다 돌아왔는데 먼저 와 있던 유림이 도애의 어깨까지 부여잡고 물었다. “그 애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어제 바닷가에 나갔다가 봤어요.” “그 애가 네가 바다에 있는 걸 봤니?” 유림의 손이 떨렸다. 불안해하는 이유가 이거였구나. 평범한 사람이라면 파도가 거센 바다에서 도애처럼 유유히 헤엄칠 수 없을 테니...

“너 그게 다 뭐야?” 연구원 하나가 양손 가득 헌옷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유림은 아이에게 숫자를 알려주다 말고 연구원에게 다가갔다. 그는 멋쩍게 웃더니 아이 앞에 옷을 늘어놓았다. “릴리 주려고 들고 왔어요. 맨날 환자복만 입으면 얘도 지겹잖아요. 다 깨끗하게 세탁했으니 걱정마세요.” 릴리. 매번 숫자로 이름 부르기 귀찮고 정 없어 보인다며 연구원들이...

도애의 일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는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숲으로 간다. 오늘 아침에도 도애는 새벽같이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유림은 아직 자고 있을 터였다. 도애는 혹시라도 유림이 깰까 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습한 8월의 공기가 확 끼쳐왔다. “다녀올게요.” 듣는 사람도 없는데 다녀오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