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단편 모음

2024년 1월 1일 오전 12시 하고도 29분 뒤. 22년 사귄 내 애인이 갑자기 29살이나 어려졌다. ** “종 쳤네.” “응. 해피뉴이어.” “1월 1일인데. 회사 쉬지?” “아무래도...” 네가 대답과 함께 탁자에 올려진 달력을 뒤적였다. 1월 1일에는 회사 안 간다고 적어놨을 리가 없는데. 일단 확인해 보는 네 오랜 버릇이다. “일출이나 보러 갈까...

**이전 이야기: https://posty.pe/rsjdpb 나는 사람이 좋다. 그것도 귀엽고 친절한 사람이. 미국에서부터 차근차근 다져온 친화력이었다. 별별 사람 다 만나보고 성격유형 검사 같은 거 하면 외향적인 성격이 97%에 달하는 건 기본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도 좋다.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을 가는 건 더더욱 좋고. 히피 스타일로 볶은 곱슬...

나는 집이 좋다. 그것도 혼자 있는 집이. 잠시 외출하더라도 가장 먼 곳이 동네 공원일 정도로 특정 바운더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굳이 벗어나야 할 이유가 있나.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MBTI 검사하면 I 범주가 97%에 달하는 극 내향인. 속해있는 공동체는 둘째치고 원체 무신경한 탓에 아주 오래된 친구들 말고는 친구도 별반 없다. 필요한 거야 인터넷 ...

“너는 내가 너 좋아한다면 어쩔래?” 새해까지 8시간 전. 같이 잘 놀던 언니가 내게 한 말이었다. 마시고 있던 밀크티가 그대로 입에서 흘러내렸다. 예전에 유명한 그 짤 뭐였지. 예나, 선정이 딸이에요? 선정이랑 무슨 사이이신지는 몰라도 말이야. 충격받았다고 주스까지 뱉나? 물론 지금은 이해 가지만. 아저씨 그럴 만도 하셨네요. “어, 그. 언니. 어. 저...

2000년 3월 6일. 우리 교환일기 처음 시작한 날이야. 언니도 기억하고 있어. 그린 언니에게. 언니. 나야.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무려 14년 동안 언니 아랫집 사는 동생 선아. 이번에 언니 다니는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초등학교는 같이 나왔는데 중학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정말 별로였어... 그래도 고등학교는 같이 다니게...

안녕.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방에 앉아 채팅을 쳤다. 늘 그렇듯 그 애는 1분이 지나기도 전에 답장을 보냈다. 안녕. 뭐 하고 있었어? 나는 미소와 함께 타자를 쳤다. 그냥. 옛날에 썼던 동화 읽고 있었어. 무릎 위에 올려둔 얄팍한 종이책을 꺼냈다. 8살 무렵 에이포 용지를 접어 만든 작은 책. 그 위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동화 한 편이 적혀있다. 동...

봄만 되면 내가 다니는 천경 여고는 시끄러워진다. 점심시간 때마다 학교 건물 뒤편이 얼마나 왁자지껄한지 안 들어본 사람은 절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벚나무 밑에 모여 서로 사진 찍어 주고 난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서로 죽고 못 사는 것처럼 구는 커플도 여럿 있다. 바람이라도 불어서 몇 그루 없는 벚나무의 꽃잎이 와르르 쏟아지면 아주 꺅...

그러니까, 난 그냥 어릴 적 그때처럼 자기 전 무릎을 꿇고 앉아 소원을 빌었을 뿐인데 내 눈앞에 요정이 찾아 왔다. 그것도 키 178cm의 생각보다 너무 큰 요정이. “진짜 요정 맞아요?” 믿기 힘들어서 한 말이었다. 난 그저 자기 전에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들어주세요.’ 이거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이 열리면서 그 여자가 나타났다. ...

여보세요? 잘 들려? 이거 네 번호 맞지? 혹시 그새 바꾼 거 아니야? 내가 쓸데없는 사람 전화기에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 음. 아무튼. 나 지금 아주 살짝 취했거든. 그 기념으로 하는 거야. 왜, 일주일 전에 너도 그랬잖아. 알딸딸하게 취해서 나한테 전화나 하고 말이야. 그때 네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 나와 나눴던 사랑이 너무 ...

1월 1일.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오래된 빌라의 벽 너머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리고 아무렇게나 틀어놓은 티비에서는 제야의 종소리가 아득히 들려온다. 나는 불 꺼진 거실에 앉아 그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새해가 시작됐다. 사실 별 감흥도 없다. 나이만 하나 더 먹었고, 앞으로의 삶은 더 힘들겠지. 연말에 회사 일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연초에는 ...

너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쓴다. 쓰긴 쓰는데, 보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아무튼 잘 지냈니? 요즘 날이 춥더라. 계절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어제까지만 해도 여름의 연장선 같더니, 날이 밝자마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래도 넌 겨울을 좋아하니까 이런 날씨를 마냥 싫어하진 않겠지. 한겨울에도 좋다며 코가 빨개져서 뛰노는 게 너 아니겠니. 얘기...

알아. 난 운이 아주 쥐뿔도 없어. 아마 세상에서 운이 제일 나쁜 사람이 나일 거야. 얼마나 나쁘냐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꼭 의자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찧고, 간단히 컵라면을 먹으려고 표장을 벗기면 기가 막히게 불량이라 라면 스프가 빠져있어. 다시마는 2개 들어있으면서. 그것뿐인 줄 알아? 동네에서 개업 기념 이벤트라도 하는 날이면 내 바로 뒤에 사람이 ...